매우 아름답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겉보기로는 그 밖의 공통점이 없는, 매우 다른 분위기의 두 그림을 놓고,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한 그림은 16세기 투스카니 지방의 화가인 브론치노의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그림입니다. 얼핏보기에 두 그림 모두 아름답지만, 그려진 화풍도 다르고, 소재도 다르고, 너무 많은 것이 다릅니다. 브론치노의 그림은 얼핏보아도 뭔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알레고리화인 것이 확실합니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이와는 너무 대조적으로 모든 것이 명백한 실내의 풍경을 그린 듯 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등장하고, 그림이 매우 매력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이 두 그림처럼 극단적인 짝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대비가 심한 두 그림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두 그림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그림에는 모두 숨겨진 의미가 있고, 그림속의 두 개의 팔이 매우 중요하다는 숨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는 이 두 개의 팔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16세기 피렌체의 화가 브론치노에 의해서 그려진 이 그림은 많은 뜻을 숨기고 있습니다. 유명한 서양 미술사나 도상해석학 관련 서적에서는 이 그림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는 하지요. 지금 이 글에서는 이 그림의 오른쪽 후경에 살짝 가리운 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얼핏 아름다워 보이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가면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소녀의 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른쪽 손과 왼쪽 손의 위치가 뒤바뀌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또, 각 손에 왼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오른손에는 황금을 들고, 오른손의 자리에 위치한 왼손에는 무언가 불길한 물체를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파노프스키는 그의 도상해석학 연구에서 이 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아름다운 가면을 쓰고, 선한 오른손인 척하고 황금을 내미는 손은 실은 불길한 수를 꾸미는 왼손이고, 자기의 속내는 오른쪽 팔에 담고 있는 불길한 이 소녀는 표리부동의 상징이다. 왼손과 오른손에 관한 중세의 사고방식과 연관지어 본다면, 황금은 왼손에 들려 있기 때문에, 실은 황금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마, 겉은 화려하지만 안에 함정을 담고 있는 무엇인가이겠지요. 그리고, 오른손은 이 황금에 관한 탐욕이 불러올 결과로서의 갖은 나쁜 일들일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많은 일들은 이렇게 속으로 위험한 결과를 가지고 올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림으로 멋지게 표현한 예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이 교훈은 세상의 온갖 일들에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저는 '국제화'라고 하는 것에 관하여 다루고자 합니다. 국제화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것일까요? 개인의 '국제화'는 무엇일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회의 국제화'는 또 무엇일까요?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국제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전 17~19세기에 유럽에서 유행했던 '그랜드 투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전 유럽의 상류층 자제들이 그룹을 이루어 명망있는 인사를 가정교사로 두고, 마차나 호화 기차를 타고, 로마/이탈리아/파리 등등을 순례하며, 경험을 쌓았다던 그 여행 말이지요. 어떤 역사가들은 이 여행에 대단히 큰 가치를 부여합니다. 지금처럼 중부유럽 국가들이 유럽연합으로 하나로 묶일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것이지요. 영국이던, 프랑스 혹은 독일이던, 심지어 러시아와 북유럽의 사회지도층 자제들이 공통의 경험을 하고, 친분을 쌓는 동안에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게 되고, 사회 통합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하나의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나아가서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의 안정된 시민 사회를 만들 수 있었던 근본적인 요인도, 이런 공통된 경험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생겨난 하나의 유럽이라는 사상이 결국 지금의 유럽 연합을 가져온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전기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회고적인 형식의 자서전 '어제의 세계'에서 이 시절을 아주 아름답게 회고합니다. 여권이 없이도 유럽 전역을 돌아다닐 수 있던 시절, 오스트리아인인 자신이 파리에서 무한정 쉽게 체류할 수 있던 시절로, 아직은 무명의 대학생이던 자신이 당시 파리에 있던 명사들인 로댕, 프루스트, 발레리와 같은 사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던 시절로 이 시절을 추억합니다. 얼핏 보기에 당시 사회는 정말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유럽에 한정해서 보자면 안정된 경제, 보장된 소득과 연금 수입, 하나의 유럽이라는 꿈을 가지고 정치적 불안도 몽상가의 야심도 없던 평온한 오늘이 내일도 계속 이어질 거라는 보장이 있는 듯히 보이는 사회...
미래의 사회가 이런 모습이기를 바라며 꿈을 꾸며, 국제화를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할까요? 전 이런 목표가 어쩌면 영원히 달성하기 힘들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고, 또 우리는 국제화에 대하여 무언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개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먼저,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더글라스 아담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는 세상의 모든 언어를 통역해 주는 바벨 피시라는 조그만 물고기가 나옵니다. 주인공들이 은하계를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는 희극인지라 당연히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의사 소통을 할까라는 독자들의 궁금증/불만을 해소시켜주기 위해서 생각해 낸 소도구지요. 이 물고기를 사용하려면, 귀에 슬쩍 밀어넣으면 되는데요, 이 물고기에 관한 더글라스 아담스의 설명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 물고기가 발견되고 나서,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 우주적으로 싸움/다툼/분쟁의 수가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진정한 이해가 없는 단순한 의사소통은 싸움만 늘려 놓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요. 제 3세계 사람들이 미국을 동경하고, 미국에 가고 그곳에서 우리가 보기에는 재미있는, 하지만 직접 겪고 싶은 생각은 없는 황당한 에피소드를 겪는 영화들의 끝은 항상 해피엔드입니다. 하지만 실제 그런 일들이 있는다면 끝은 해피엔드가 아닐 확률이 더 높을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긴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스콧 올슨 카드의 SF소설인 '사자의 대변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항성계 사이를 여행할 수 있게된 아주 먼 미래, 루시타니아라는 행성에 인간들의 식민지가 생깁니다. 식민화를 시작하기 전에는 몰랐었지만, 막상 루시타니아에는 '피기'라고 불리는 작은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문명 수준은 우리의 석기 시대 정도였지요. 사람들은 인간들이 '피기'와 접촉하는 것을 막습니다. 이들이 스스로의 발전단계를 거쳐서 자연스럽게 문명에 도달하도록 한다는 명분 아래에서 이들을 관찰하기 위한 소수의 학자들만이 이들과 만날 수 있게 합니다. 이들 학자들은 '피기'들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쳐서 의사소통을 하고, 많은 것을 비밀스럽게 가르쳐주게 됩니다. 이 관계들 때문에, 이 행성이 위기를 맞게 되고, 인간과 '피기' 사이에 진정한 의사 소통이 필요하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던 것은 발전된 인간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도구를 얻고 하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천천히 문명을 받아들여 이제 우주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자기들이 살 수 있는 행성을 모두 인간들이 점령해 버려서, 결국 자기들은 아무곳도 가지 못하는 그런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하고, 그 순간에 우주를 여행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지요. '인간은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말을 하면서,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 해서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는거야. 언젠가 우주의 어느 별에 갔을 때,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를 만날까봐 두려운거지.'

세계화/국제화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책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가 아닐까 합니다. 저자 토마스 프리드만은 세계화는 인간의 본성, 잘 살고 싶고 더 재미있는 것을 즐기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에 의지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욱 퍼져나갈 것이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올리브나무'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뒤떨어지게 될 뿐이다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저자는 자신이 여행한 이슬람 국가들의 사람들이 정부에서 금지시킨 위성 TV안테나를 통해서 미국의 시트콤을 열심히 보는 이야기를 하면서, 제 3세계 국가들고, 이런 더 편안하고 더 즐거운 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국민들의 욕구를 무한정 막을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개방화되고 하나의 세계가 이루어 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하나의 세계의 개념은 자연스러운 것일까요?
물론 나쁜 얘기만은 아닙니다. 어떤 부분들은 모두들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니까요. 특히, 제 3세계의 부패/독재 정부가 도태될 수 밖에는 없다는 부분은 많은 공감도 갑니다. 하지만, 이 세계화를 실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프리드만은 자본의 이동에 따른 세계화/국제화, 그리고 더 자극적인 서구 문화의 전파에 의한 세계화.국제화를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세계화/국제화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우리가 이 방법을 쓰려하는 이유는 단지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국가의 사람들이 단지 더 잘 살고, 미국의 쇼 프로그램을 매주 제 시간에 보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이 사람들은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에서 금지된 소설들을 읽던 이란의 여인네들처럼, 단지 누군가가 자기의 행동을 금지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것만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사자의 대변인'의 인간들이 '피기'들을 가둬놓은 것처럼, 국제화라는 말로 다른 사람들을 규정짓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이런 이해의 부재와 잘못된 세계화의 개념이 맞물려서 진정한 세계화/국제화를 어렵게 하는 것일겁니다.

이제 글의 맨 처음에 이야기했던 두 개의 그림 중 다른 하나의 그림으로 넘어가서 좀 더 밝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베르메르의 이 그림은 저울을 들고, 귀중한 물건의 무게를 재고 있는 여인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저울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여러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 저울은 그림 속 공간에서 빛의 촛점이 됩니다. 또, 원근법 상의 소실점이 되어서 의미의 중심을 이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이 저울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며, 벽에 걸려있는 '최후의 심판' 그림이 주는 도상학적인 의미와 맞물려서 많은 해석을 낳고는 합니다. 그림을 열린 결말의 드라마와 같이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귀중품의 무게를 다는 일에 열중해 있어, 최후의 심판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교훈적 해석을 낳기도 합니다. 저울에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여인은 귀중품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잡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뒷 벽에 그려져 있는 최후의 심판 그림과 어우러져서 최후의 심판에 누가 구원받을지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해석을 낳기도 합니다. 이는 베르메르의 가톨릭 신앙과 어우러져서 그가 이 그림을 칼뱅파의 예정설을 반박하는 주장을 담은 그림으로 기획했다는 해석을 낳기도 합니다. 이런 극단적인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할 만큼 그림의 구조는 열려있습니다. 교훈적 그림이라 해도, 아니면 종교적 프로파간다라고 해도 이 그림이 너무 아름답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베르메르에게는 세상이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열린 세상이었겠지요. 그리고, 현실이 어떠하든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었을 겁니다. 우리 세계도 아직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열려 있습니다.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 하나는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한 때 뉴요커지의 기자였던, 빌 버포드가 미국/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요리를 경험하고 쓴 '앗 뜨거워'라는 책에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지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가 유명한 투스카니 푸주한에게 고기를 다루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투스카니 지방에 머무르고 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가 머무르던 푸줏간에서 이탈리아 소시지를 만들고 있을 때, 그와 같이 일하던 두 사람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노래는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오 솔레미오'였지요. 그와 같이 일하던 한 노인과 한 중년의 여인이 멋진 바리톤/메조 소프라노 음색으로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목청을 가다듬는 것을 보면서, 빌 버포드는 '제발 이 노래만은 안돼'라고 마음속으로 절규합니다. 그에게 이 노래는 아름다운 피렌체의 초여름 날에 어울리는 노래가 아니라, 희화화된 베네치아의 곤돌라 뱃사공 복장을 한 남자가 나와서 싸구려 아이스크림을 선전할 때 부르던 그 노래였기 때문이지요. '오 솔레미오'는 이탈리아 '키치'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사람들 간에는 얼마나 큰 문화적 간극이 있는 것일까요? 노래가 끝나며 노인과 중년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에게 '브라보'라고 외칩니다. 이 모습을 보던 빌 버포드는 한 나라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장면들이 다른 곳에서는 단순히 B급 대중 문화의 소재로 바뀌게 되는 것을 보고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처음 이 글을 구상했을 때에는 이 이야기는 바벨 피시의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 놓고자 했었습니다. 세계화와 국제화의 최대 수혜자인 백인/유럽인들 조차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했었지요. 하지만, 글을 쓰고, 고쳐 쓰고 하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는 의사 소통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닿았습니다. 글을 쓰다보니, 이 이야기 다음에는 오히려 더 여행을 많이 하고, 외국의 문화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결론밖에는 내릴 수 없었으니까요. 이 이야기는 오히려 미국 문화에서 변질되어버린, 강요된 키치가 다시 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아름다움이었을 겁니다. 분위기의 아름다움, 노래의 아름다움,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아름다움... 그리고, 이것을 느끼게 한 것은 작가인 빌 버포드의 감수성이었겠지요. 어쩌면, 국제화/세계화에 가장 필요한 것은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일 것입니다.
사회 전체가, 모든 사람이 '국제화'될 수는 없습니다. 주류 언론들이 항상 좋다고 말하는 '서구화'마저도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더욱 힘든 진정한 국제화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한 개인 개인은 다른 문화를 진정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여러 길 중에서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 즉 감수성에 의해서 이 일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잔 손택은 '예술 작품을 보는 진정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이 감수성이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구별하게 하는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제 글은 '감수성'을 자극할만큼 좋은 글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브론치노와 베르메르의 그림은 '감수성'을 자극하고, 다른 이를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